순정만화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바는 이해하지만, 자신이 연애를 잘 못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꼭 명작 순정만화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남녀 대화의 기술 같은 거 배울 필요 없이, 훨씬 더 좋은 처방전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순정만화는 뜻 그대로 순수하게 감정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부터, 변하고 퇴색하고 왜곡되기 마련인 타인의 감정까지. 그 결을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이루어보려는 장르기 때문이다.
스트로가츠가 <뉴욕타임스>에 연재한 수학 칼럼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X의 즐거움'은 그 글을 모은 책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수학을 알게 되면 몇 명과 연애를 한 뒤에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게 좋은지도 알 수 있다고 독자들을 유혹하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수의 세계에 흥분하게 되고, 인간이 화성에 탐사선을 보낼 수 있었던 위대함도 만고 쓸데없는 수학에 매력을 느낀 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 콜레라 시대의 사랑 >. 어디선가 이 책이 밸런타인데이 추천도서라고 하던데, 이 책은 51년 동안 첫사랑을 기다린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당연히 목록에 올라갈 만하다. 그러나 정작 < 콜레라 시대의 사랑 >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매끈하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10대에서 70대가 된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엉망진창인 상황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는데,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된다. 의미의 집합체인 사랑이 그런 것이었다니.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다니. 그래서 연애 경험이 너무 없어도 안 되겠지만, 연애를 많이 해본 이들과 사귀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이 찼든 차였든, 그런 허무를 거푸 경험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꼭 냉소가 숨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 차가운 마음을 감싸주는 따뜻한 개그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는데,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몰라." 이제까지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닌 사람이, 그것도 대인관계도 매우 좋고 성격도 활발한 이가 이렇게 말했다. 그 고백이 순간 스산했지만, 뒤돌아 매우 반가웠다. 사랑이 그리 알기 쉬운 것이라면 이토록 힘들 리도 귀할 리도 없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감우성이 했던 대사가 이랬던가. 너나 나나 13살 때부터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해왔어. 그런 우리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대사는 바로 이런 뜻이었다. '나는 모른다, 사랑을.' 그 말을 듣고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그 소설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남자나 여자를 만날 '때'가 왔는가는 보이지. 그때가 언제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 하지만 그때가 와도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연애가 안 돼. 무엇보다 '사이가 좋을 때'는 절대 물으러 오지 않아. 사실상 나쁜 운명이었다 해도, 좋으면 그냥 넘어가고 있다는 거지. 그게 뭘 뜻하겠어? 운명의 짝 같은 건 없다는 거야. 남녀 관계 같은 거 물어보지 마. 자기한테 해가 되는 사람은 그냥 헤어지면 돼."
한 작가 지망생이 미국 최남단 섬 키웨스트로 고생 끝에 찾아간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전부 쓰레기일 뿐 나아지지 않더라고요"라며 창작의 고통을 털어놓자 대문호가 건넨 첫 번째 교훈은 이거다. "절대 샘이 마를 때까지 자기를 펌프질해서는 안 돼. 내일을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하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나 인생을 길게 살아본 사람들, 어떤 분야든 '숙련됨'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릴 충고다.
누군가에게 자꾸 뭔가를 주는 걸 사랑이라고 한다지. 그러니 별별 기념일을 챙기고, 매달 14일을 무슨무슨 날이라고 하는 걸, 뭐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주고 싶은 이유, 받고 싶은 이유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쇼핑을 잘 못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취향에 딱 맞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준 것보다 내가 준 걸 가장 마음에 들어해야 하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등등. 자꾸 욕심이 난다. 돈 써서 마련하는 건 나인데 정작 내가 더 애가 닳는다.
누구나 한 번쯤 '그때 그 사람'을 만났던 시절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놓쳐버린 그가 '내 삶의 유일한 단 한 사람'이지 않을까. 다시 돌아가서 잘못된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내용을 담은 소설이 있다. SF는 물론 모든 장르의 작가들이 찬사를 바치는 켄 그림우드의 <리플레이>. 시간여행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이 오마주를 바치는 전설적인 소설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역할을 맡은 여주인공은 이런 말을 듣는다. "예전에는 전남편과 비슷해 보이더니, 이제는 새 남자친구와 비슷해 보이네요." 그녀는 자신다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음에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면 이와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 내가 원하던 관계가 아니었어', '그래, 그 사람에게 너무 휘둘려서 나다움을 잃고 있었어'. 하지만 우리가 겪는 상처와 실연에 대한 치유가 '진정한 나는 따로 있었는데 그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는 깨달음으로 가능할까? 그리하여 과거의 나를 미숙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과연 다음 사랑을 시작할 때 도움이 될까? 그리고 누군가를 닮아가는 게 나를 잃어버리는 거라면, 그럼 '진정한 나'는 원래 어떤 모습일까?
방금 만나고 헤어져도 잠자기 전 안부 인사가 오지 않는 게 신경 쓰이는 관계가 있고, 드문드문 보아도 상대의 일상이 충분히 짐작되고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만으로 충만한 관계가 있다. 이렇게 물으면 누구나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KTX와 영상통화와 메신저로 무장한 오늘의 우리는 왜 이리 연애가 불안한가. 그건 내가 관계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연애는 중앙집권형이 아니라 지방자치형이다. 그러니 멀리 떨어진 연인들이여 불안해하지 마라. 당신이 있는 곳이 바로 연애의 수도(首都)니까.
영화에는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튜링이 정작 대인관계에서 서툰 장면이 나온다. 이는 사실은 인간들의 우습지도 않은 대화법에 대한 비웃음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살면서 끊임없이 요구받는 어떤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분명하게 말을 해'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연애 코칭 내용의 대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어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것인가. 한국어를 20년 넘게 아무 문제 없이 써온 선남선녀들이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이성과의 대화법에 대한 코칭을 진지하게 받는다.